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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지리

수리남과 뉴욕을 바꾼 네덜란드 역사

by 돈파페 2024. 10. 3.

안녕하세요, 오늘 포스팅에서는 네달란드가 17세기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뉴욕을 내주고 남미의 수리남과 인도네시아의 룬섬을 얻게된 역사에 대해서 다루어보겠습니다. 당시 선택이 오늘날까지 미친 영향을 무엇일까요

브레다조약과 뉴암스테르담

1667년 브레다 조약(출처 : 위키피디아)
1667년 브레다 조약(출처 : 위키피디아)

네덜란드가 뉴욕을 내주고 수리남을 얻은 사연은 매우 흥미로운 역사적 사건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와 영국은 세계 각지에서 무역로와 식민지 지배를 두고 경쟁을 벌였습니다. 이 경쟁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바로 1665년에 시작된 제2차 영란전쟁입니다. 

 

1667년, 전쟁이 끝난 후 네달란드와 영국은 브레다 조약을 체결합니다. 이 조약에서 네덜란드는 전쟁의 승전국으로 여러 이점을 얻게됩니다. 바로 영국에게 뉴욕을 주고 남미의 수리남과 인도네시아의 룬섬을 얻게된 것입니다. 당시 뉴욕은 뉴암스테르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네덜란드 식민지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 도시는 발전되지 않은 상태였고, 전략적 가치도 높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수리남은 설탕 재배와 무역의 중요한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이 지역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뉴욕은 현재 세계적인 금융과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였지만, 당시에는 네덜란드가 얻은 수리남과 인도네시아의 항신료 무역 중심지인 룬섬이 더 유리한 것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식민지 시대의 경제적 이익은 설탕, 향신료 같은 자원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네덜란드가 뉴욕을 폭하고 남미의 수리남을 선택한 것은 그 당시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식민지로의 수리남

수리남 농장에서 일하는 주민(출처 : freeimage)
수리남 농장에서 일하는 주민(출처 : freeimage)

수리남은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 아래,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이 운영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의 원주민들은 질병과 혹독한 노동에 의해 크게 줄어들었고, 결국 네덜란드는 서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데려와 농장에 일을 시키게 되었습니다. 

 

이로인해 오늘날 네덜란드 출신의 유명한 운동 선수들은 수리남 출신 아프리카계의 후손입니다. 루드 굴리트, 에드가 다비즈, 반다이크 같은 축구 선수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수리남은 1975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했지만, 네덜란드의 식민지배 시절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네덜란드와 수리남의 관계는 단순히 식민지와 식민지 지배국의 관계를 넘어, 문화적, 인종적 교류가 깊게 얽혀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룬섬

인도네시라 룬섬 해변(출처 : 위키피디아)
인도네시라 룬섬 해변(출처 : 위키피디아)

한편, 네덜란드가 뉴욕을 내주고 얻은 또 다른 전리품은 인도네시아의 룬섬입니다. 룬섬은 그 당시 중요한 경제적 이점을 제공했습니다. 이 섬은 세계적으로 향신료, 특히 육두구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 당시 네덜란드는 이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마무리

이처럼 시대적 상황에 맞는 선택이 나중에 보면 크게 다른 결과를 보여주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영국에게 뉴욕을 넘기지 않았더라도 나중에 등장하는 미국과 아메리카의 식민지를 두고 있는 여러 강대국들 사이에서 계속 영토를 유지했을지는 미지수입니다.